"8살 아들 성폭행했나"…재판에 선 '희대의 악녀' 결말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2-11-12 09:00   수정 2023-04-27 16:23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피고인은 여덟 살에 불과한 아들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에 대해 아직 제대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답변을 요구합니다.”

1793년 10월 14일 프랑스 파리 혁명재판소. 배심원의 질문에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재판의 주인공은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 왕비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문란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프랑스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고, 급기야 외세를 끌어들여 반역까지 시도하다 잡힌 그 ‘희대의 악녀’였습니다. 질문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재판정은 앙투아네트가 정의의 심판을 받는 모습을 구경하러 온 방청객들로 시끌벅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감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다른 질문엔 소극적인 태도로 “일부러 한 게 아니다” “그런 적 없다”고 답하던 앙투아네트. 이 순간만큼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앞서 제가 답하지 않았던 건,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런 비난을 뒤집어쓰는 걸 이 세상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어머니께 호소합니다.” 재판 기록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방청객들 사이에서 전율이 일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동정과 공감의 눈길을 보냈다. 그녀를 비난하던 평범한 여인들조차 ‘재판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빵이 없으면 과자(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던 철없는 왕비.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짜 사치와 향락을 누렸던 여자. 그러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전설적인 악녀.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녀는 과연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을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원수 나라’ 출신 왕비, 민중의 사랑을 받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 나온 수많은 명작 중에서도 가장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으는 그림은 가로 1.9m, 높이 2.7m의 대작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778)입니다. 양승미 학예연구사는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이 소장한 많은 앙투아네트 초상화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을 빌렸다”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국내 인지도가 워낙 높고, 작품의 완성도도 탁월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왕비의 기품있는 외모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건 드레스입니다. 이 그림에서 왕비는 전통적인 프랑스식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화려한 레이스와 옷자락 등이 잘 표현돼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유럽의 유행을 선도하던 ‘패셔니스타’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옷 색과 디자인은 물론 머리모양까지도 그림(판화)으로 유럽 전역에 뿌려져 지금의 패션 잡지 역할을 톡톡히 했죠.

이름이나 생김새, 옷차림만 보면 앙투아네트가 ‘뼛속부터 프랑스인’이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앙투아네트는 합스부르크 가문, 즉 오스트리아 출신입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오랜 기간 치열하게 경쟁하고 10년 넘게 전쟁까지 치렀던 ‘원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더 의외죠. 정확하진 않지만 아주 쉽게 비유하자면, 조선 왕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을 왕비로 맞거나 병자호란 이후 중국인을 왕비로 맞은 격이니까요.

원수 집안끼리의 결혼이 이뤄질 수 있었던 건 당시 유럽의 정치적 상황 때문입니다. 신흥 강국이던 프로이센(현재 독일)과 영국이 동맹을 맺었거든요. 적의 적은 우리 편. 오랫동안 원수지간이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도 손을 잡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걸출한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에 쓸 ‘장기 말’로 자신의 열한번째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를 낙점합니다.

15살이었던 1770년 프랑스의 루이 16세에게 시집을 간 안토니아. 그녀는 이름을 프랑스식인 앙투아네트로 바꾸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합니다. 의외로 국민 상당수는 앙투아네트를 환영했습니다. 젊고 아름다운데다 귀족다운 기품이 감돌았거든요. 이 결혼 자체가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는 상징이기도 했고요.

앙투아네트가 다소 사치를 부리기는 했습니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왕족들은 일종의 연예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당시 왕족들은 공개적으로 비싼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광경을 사람들에게 보여줬고, 사람들은 이를 일종의 TV 리얼리티 쇼처럼 오락거리로 즐겨 봤죠. 그 사치마저도 전임 왕족들과 비교하면 10분의 1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자선사업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다른 왕족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빈민들을 돕기 위해 어린 첫째 딸에게 새해 선물을 사줄 돈까지 다 써버린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엄마 미워!”하는 투정을 들으면서요.
“이게 다 오스트리아 여자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머지않아 온 프랑스의 미움을 받는 ‘악녀의 대명사’가 됩니다. 여기엔 다양한 이유가 작용했습니다. 먼저 프랑스의 정치·경제 상황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앞선 루이 14세(‘태양왕’)와 루이 15세 시대 프랑스가 겉보기에 최전성기를 누리긴 했지만, 이는 사실 ‘빚잔치’로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앙투아네트의 남편인 루이 16세 때는 이 빚에 대한 이자를 갚는 데 국가 예산 절반이 나갈 정도였습니다. 귀족들은 탈세를 일삼았고 사회 체제는 모순을 드러내며 삐걱대고 있었죠.

루이 16세는 온화한 지성인이었지만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없어서 위기를 헤쳐 나갈 왕의 그릇은 아니었습니다. 대인기피증과 어눌한 말투 때문에 민중이 보기에도 매력이 없었고요. 애처가여서 왕의 공식 애인인 총희(寵姬)도 두지 않았습니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잘한 일입니다만, 당시 총희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사교계에서 왕실을 보좌하는 ‘공식 욕받이’ 역할이었거든요. 왕실이 사치를 부린다고 하면 ‘씀씀이가 헤픈 총희 때문’이라고 하면 됐고, 사람들은 총희를 욕하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하지만 총희가 없으니 직접 사교 행사를 준비하고 사교계를 누비는 건 왕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왕비가 직접 욕을 다 먹게 됩니다. 귀족들도 앙투아네트가 고까웠습니다. 왕비가 프랑스 왕실의 전통을 어기고 지위가 낮은 이들을 중용했던 점, 고리타분한 고위 귀족 대신 또래들과 어울렸던 점, 소박한 별궁을 짓고 친한 사람들만 자주 봤던 점 등이 문제가 됐습니다.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던 시대상을 감안하면 이는 명백한 실책이었습니다. 왕비가 철천지원수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요.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밉보인 앙투아네트는 정치적으로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루이 16세의 심리적인 문제로 인해 결혼 후 7년간 아이가 없었던 점까지 공격의 대상이 됐습니다. 왕비의 문란한 사생활 탓이라면서요. 사람들은 그녀를 로트리시엔(오스트리아 여자라는 뜻이지만 멸칭으로 쓰였다)이라고 불렀습니다. 거리엔 왕비를 소재로 하는 온갖 ‘지라시’가 돌았고, 관련 음란물마저 판을 쳤습니다. 각종 황색언론들은 불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기 피해자 왕비, 가해자 누명을 쓰다
앙투아네트의 평판에 결정타를 먹인 건 프랑스 혁명 4년 전인 1785년 벌어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입니다. 요약하면 타락한 귀족과 사기꾼에게 앙투아네트가 피해를 본 사건입니다.

발단은 프랑스 대귀족 출신인 루이 드 로앙 추기경입니다. 그는 행실이 지저분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치스럽고 입이 가벼웠으며 온갖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니는 사람이었죠. 앙투아네트는 진작 로앙의 이런 면모를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 고향인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프랑스 대사가 로앙이었거든요. 그는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욕하다가 딱 걸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왕비가 된 후 앙투아네트가 로앙을 멀리한 것도 당연합니다.

졸지에 출셋길이 막힌 로앙은 필사적으로 앙투아네트의 호감을 사려고 했습니다. 백작 부인을 사칭하던 사기꾼 잔 드 라 모트(라모트)가 이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로앙에게 “내가 왕비의 최측근”이라며 접근했고,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바치면 왕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했죠. 믿음을 주기 위해 편지 위조는 기본, ‘왕비 대역’을 섭외해가면서까지 공을 들였습니다. 잔을 철석같이 믿게 된 로앙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서 라모트에게 건넵니다. 당연히 ‘배달 사고’가 납니다. 라모트는 목걸이를 해체해 런던에서 팔아버렸죠.

허리가 휘도록 비싼 뇌물을 해다 바쳤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 로앙. 속만 썩이다가, 몇 달 뒤 간신히 용기를 내서 앙투아네트에게 묻습니다. “목걸이는 잘 있나요?”. 돌아온 답. “무슨 목걸이요?”. 로앙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잔뜩 화가 난 앙투아네트는 의회에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합니다.

법정에서 로앙은 “나는 속았을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로앙의 죄도 크지만, 속은 건 사실인데다 여기저기 돈을 뿌린 덕분에 무죄로 풀려납니다. 라모트는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탈옥해 영국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잔 발루아의 회고록>이라는 책을 냅니다.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럽고 방탕하며 문란한 사람이고, 자신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이 담겼습니다. 하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갔죠.

사기꾼의 수작이라는 게 법정에서 밝혀졌는데도 궁지에 몰린 건 앙투아네트였습니다.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문란한 왕비가 로앙과 라모트를 이용하고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다시 온갖 헛소문들이 재생산되고, 혁명 세력은 이를 이용해 헛소문을 더욱 부풀렸습니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이렇게 나온 헛소문입니다. 빈민을 돕는데 힘쓴 그녀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지만, 이 말은 200여년 뒤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헛소문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터집니다. 왕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돼 있긴 했지만 처음부터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를 처형해야 한다는 분위기까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부부가 적국이자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근처로 도망가려다가 발각되는 등 여러 잘못을 저지른 것 때문에 여론이 급격히 나빠집니다. 혁명을 주도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루이가 죽어야 국가가 산다”고 주장했고, 루이 16세는 1793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왕비, 단두대로

통치자의 가족들이 분노한 민중이나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는 건 드문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따지면 이는 용납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영부인과 자녀까지 사형시키는 격이니까요. 하지만 혁명은 피를 먹고 자랍니다. 당시 혁명 세력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앙투아네트가 ‘사형감’이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앙투아네트의 아들인 루이 17세를 학대해 거짓 진술서를 받아내고, 이를 토대로 터무니없는 근친상간 혐의를 주장할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이런 ‘무리수’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의 운명은 재판 전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재판 이틀 뒤인 10월 16일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에 단두대에 오릅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왕족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사형집행인의 신발을 실수로 밟은 뒤 나왔습니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일부러 밟은 건 아니었어요.”

그의 어린 아들은 학대당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사합니다. 딸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고, 이렇게 그녀의 핏줄은 끊깁니다.

앙투아네트의 죄가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을 정도의 죄는 없다는 게 많은 역사가의 얘기입니다. 20세기 오스트리아의 대문호 슈테판 츠바이크가 앙투아네트의 전기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내린 평가가 대표적입니다. “사소한 소재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내 창작력을 과시하는 예술가처럼, 운명은 의지가 부족하고 연약한 인물을 통해 위대한 비극을 만들어내곤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렇게 운명에 의해 장대한 비극의 희생자가 됐다.”
선동가와 사기꾼의 최후

당시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난을 주도하며 근친상간 혐의를 제기한 건 과격한 선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자크 르네 에베르입니다. 그는 혁명파 중에서도 특히 급진적이었습니다.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기득권에 대한 분노에 불타던 프랑스 민중에게 크게 지지받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과격한 행보가 그를 정치적인 궁지에 몰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민중봉기로 반전시키려던 에베르는 들켜서 사형됩니다. 그 최후는 앙투아네트보다 훨씬 품위가 없었습니다. 재판장에게 모자를 던지는 추태를 보이는가 하면 사형장에서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으니까요.

혁명재판소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악용되다 2년 뒤인 1795년 폐지됩니다.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장도 단두대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판 돈, 새빨간 거짓말이 담긴 책으로 막대한 돈을 번 사기꾼 라모트도 천벌을 받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한 뒤 파리에서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치다 추락사하거든요.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1804년 황제에 오르면서 왕정보다 더욱 권위적인 정치체제로 퇴보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준비한 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코너에 대한 설명을 드리며 글을 끝맺으려 합니다. 지난주 독자 댓글 중에서는 기사 내용과 특정 정치 세력을 연결 짓거나 “미술에 현실을 갖다대지 말라”는 말씀이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이 코너에서는 최대한 많은 분께서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특정 세력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은 일부러 제외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미술이나 역사는 현실과 관련지을 때 그 의미가 배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코너를 통해서는 보편적인 진리들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사람 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선동가와 거짓말, 저질 언론, 군중 심리의 결합은 폭력과 비극을 낳는다”는 것처럼요.

*이번 기사는 안토니아 프레이저의 책<marie antoinette:="" journey="" the="">에서 상당 부분을 참고했습니다. 이 밖에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나카노 교코의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여러 학술 논문 등을 참조했습니다만 모두 프레이저의 책에 수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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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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